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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탁 칼럼 ‘海印(해인)’ 원남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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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진 조회 2,073회 작성일 2011-01-07 13:21

본문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 승주 송광사는 우리나라 불교의 삼대 사찰입니다. 이 절들은 불교의 핵심에 해당하는 佛 ․ 法 ․ 僧을 대표하고 있어서입니다. 통도사는 석가모니불 진시사리를 모시고 있기에 佛寶(불보) 사찰로서,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을 소장하고 있어서 法寶(법보) 사찰로서, 송광사는 재가 ․ 출가자 교육이 활발하기에 僧寶(승보) 사찰로서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들 사찰 이름은 우리 원불교 교당 이름과 다릅니다. 원불교 식으로 이들 사찰의 이름을 지으면 해인사는 합천에 있으니까 합천사 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통도사는 양산사로, 송광사는 승주사로... 그런데 해인사와 합천사, 통도사와 양산사, 송광사와 승주사는 어감부터 다릅니다. 사찰 이름을 지명에 따라 지으면 이렇게 어색한데 우리 원불교는 이 어색한 동네 명으로 모든 교당 이름을 짓고, 또 그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문제 제기조차 하지 않아 왔으니...
해인사의 海印(해인)이라는 이름의 뜻부터 풀이해 보지요. 海는 바다이고, 印은 ‘손으로 사람을 꽉 누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海印은 ‘꾸욱~ 하고서 바다를 누르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바다를 누른다는 것은 우리들 마음을 바다에 비유해서 마치 파도처럼 요란한 우리들 마음을 잔잔하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해인사 위치는 천재지변의 위험으로부터 가장 안정된 곳이어서 이런 식의 이름 붙이기가 가능했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일상수행의 요법 가운데 첫 번째 구절인 “심지는 원래 요란한 마음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가 떠오릅니다. 요란한 마음이 ‘海’이고, 자성의 정이 ‘印’에 해당하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일상수행의 요법을 암송하는 것보다 해인이라는 이름을 우리들 가슴 속에 품는 것이 요란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 물론 해인이라는 문학적 은유의 힘도 작용한 탓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저는 각 교당마다 마음공부의 목표로 삼고자 하는 내용을 교당 이름 앞에 붙일 것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해인 원남교당’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원남교당 도반들은 요란한 마음을 없애는 것을 마음공부의 가장 큰 목표로 삼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하긴 ‘어리석은 마음’, ‘그른 마음’보다 요란한 마음을 잠재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또 힘든 공부인데 원남교당 도반들은 이 어려운 공부 길을 선점한 셈이 되나요?
어쨌든 지금의 동네 중심으로 만들어진 교당 이름을 좀 바꾸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남교당, 종로교당, 돈암교당, 정릉교당, 사직교당... 이런 식 이름 짓기는 다른 교당과의 구분을 위한 행정상 편의 말고는 어떤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익산 총부마저도 총본부를 의미하는 행정상의 이름인데 교당 이름조차도 이런 행정상 편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답답할 따름입니다.
흔히들 원불교에는 종교 문화가 엷다고 말합니다. 아마 사실일 것입니다. 교단 역사가 채 1백년도 안되었기에 천 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기성 종교의 문화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겠지요. 그렇지만 짧은 역사 속에서도 종교 문화의 싹을 나름대로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주장하면 “재원이 부족해서...”라고 반박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교당도 멋있게 지으려면 돈이 많이 들어가는 것이 사실이지요. 그렇지만 돈이 안 들어가더라도 원불교 종교문화를 키울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교당 이름을 좀 그럴듯하게 짓는 일입니다. 교당 이름을 ‘해인 원남교당’이라고 짓는데 얼마나 돈이 더 들어가겠습니까? 우리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해서 그런 것이겠지요.
오늘 날은 ‘기호 시대’입니다. 쉽게 말해서 ‘옷이 날개다’ 하는 시대이지요. 그렇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옷이 날개이니까 비싼 옷을 사서 입어야 한다는 함정이지요. 비싼 옷은 멋있게 보일 수 있는 하나의 충분조건일 뿐 싼 옷으로도 멋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호주머지 사정이 여의치 않은 사람일수록 이런 식의 옷 입는 방식을 쫓아야 하겠지요. 바로 이것이 원불교가 채택해야 할 전략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호화롭고 비싼 건물의 교당보다는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교당을 생각해 봐야 할 시기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