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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탁 칼럼 칼잡이의 마음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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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진 조회 1,616회 작성일 2011-01-07 13:20

본문

칼잡이에게도 마음공부가 있을까요? 일본에선 ‘무사의 道(도)’라는 말이 있으니까 칼잡이에게도 마음공부가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 칼잡이가 소를 잡는 백정이라면 우리들 생각은 어떨까요? “설마 이들에게도?” 하는 의심을 가질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 춘추전국시대 梁(양)나라 文惠君(문혜군)은 한 백정의 소 잡는 기술을 보고 이런 의심을 말끔히 없앴습니다. <장자> 양생주 편에 나오는 내용인데 그 원문을 소개하겠습니다.

包丁(포정)이라는 백정이 칼을 들고 동작을 시작하자 뼈 사이에 힘줄의 틈을 베는 칼 소리가 듣기 좋았습니다. 마치 고대 桑林(상림)의 아름다운 춤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포정이 소를 다 잡은 뒤에도 소는 자기가 죽은 지조차 몰랐습니다. 문혜군은 “자네 기술이 이처럼 신의 경지에까지 도달 했는지 미처 몰랐네” 하고 감탄했습니다.
이에 포정은 소를 잡을 때 사용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道라고 대답했습니다. 처음 소를 잡을 때는 그저 한 마리 소만이 눈 앞에 보였는데 3년이 지나니까 소가 아니라 소의 힘줄과 뼈의 구조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저는 소를 정신(마음)으로 대하지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눈의 작용이 멎으니 정신(마음)의 자연스런 작용만이 남습니다.
이어 포정은 처음 시작한 소잡이가 한 달에 한 자루씩 칼을 바꾸는 것은 소의 뼈를 자르기 때문이고, 솜씨 좋은 소잡이가 1년에 한 자루씩 칼을 바꾸는 것은 소의 살을 자르기 때문입니다. 제 칼이 19년이나 되었는데도 막 숫돌에서 갈아온 것처럼 예리한 것은 힘줄과 뼈의 틈 사이를 누비며 가르기에 뼈나 살을 자르지 않아서입니다. 그리고 칼은 더 없이 얇아서 거의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으로 틈을 가르기에 여유가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습니까? 이 정도 수준에서 소를 잡으면 우리들이 천대시하는 백정이라도 그 앞에서 고개가 절로 숙여질 것입니다. 당시 왕이었던 문혜군 조차 포정의 솜씨에 감탄을 했으니까요. 포정은 어떻게 소를 잡았기에 우리들 마음을 이렇게 뒤흔들어 놓을 수 있을까요. 한마디로 마음공부가 잘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공부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저는 의사소통학(커뮤니케이션학)이 전공이기에 의사소통학 관점에서 말씀드리면 感官(감각기관)이 아니라 心官(마음기관)으로 하는 것이 마음공부라고 정의하겠습니다.
우리들은 외부와 의사소통을 할 때 안이비설신(눈・코・귀・혀・몸)과 같은 오관을 사용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하는 것들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것을 보고, 좋은 소리를 듣고, 향긋한 냄새를 맡으면 행복해 합니다. 반면 더러운 것을 보고, 나쁜 소리를 듣고, 불쾌한 냄새를 맡으면 불행해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더 높은 명예를, 더 강한 권력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행복과 불행은 이런 식으로 오관으로부터 느껴지는 것에 따라 결정될까요? 그렇지만 이 세상에는 돈과 명예와 권력이 없이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돈과 명예와 권력 때문에 불행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궁극적인 행복과 불행은 감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심관이 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눈이라는 ‘감관’으로 더러운 것을 보아도 우리들 마음인 ‘심관’으로 깨끗하게 느끼면 그 더러운 대상은 우리들 마음에서 깨끗하게 바뀝니다. 마찬가지로 ‘감관’의 불행을 ‘심관’의 행복으로 바꾸면 그것이 곧 진정한 의미의 행복입니다.
포정은 이런 이치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감관(눈)으로서 소를 대하지 않았습니다. 감관으로 대하면 그의 눈에는 소의 뼈와 살과 힘줄만 보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소를 잡으면 그의 칼솜씨는 뼈와 살과 힘줄만 빗겨 가는데 힘쓸 뿐입니다. 그러다 보면 오히려 그의 칼은 뼈에 부딪히면서 칼의 날마저 무디어지고, 소도 아품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는 해가 갈수록 소를 심관(마음의 눈)으로 대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소의 복잡한 구조도 한 눈에 보였습니다. 이 상태에서 칼을 다루다보니 소는 언제 죽었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히 해체되었습니다. 이런 백정의 자세야말로 마음공부가 제대로 된 자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사의 복잡함은 소의 구조와도 비슷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좌충우돌하면서 공연히 정신과 힘만 소비합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이치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이치를 연구하는 것이 제대로 된 사리연구입니다. 이런 사리연구를 위해 우리는 ‘감관’이 아니라 ‘심관’으로서 세상을 보는 지혜가 필요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