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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탁 칼럼 ‘검을 玄’의 삶인가, ‘누를 黃’의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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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진 조회 1,918회 작성일 2011-01-07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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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일원상서원문>에 나타난 노장사상을 언급하기 위해 노자의 <도덕경> 제 1장을 인용한 적이 있었다. 이 때 1장의 앞부분은 설명했지만 뒷부분, 즉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에 대해선 풀이하지 않았다. 이를 해석하면 “이 둘(有名과 無名)은 같은데서 나왔지만 다만 이름이 달라 소위 ‘어두움(玄)’과도 같다. 어둡고, 또 어두운데 이 가운데 묘(妙)함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이다. 해석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그 뜻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어두움(玄)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이다 그런데 이 ‘玄’이 노장사상의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이럴진대 ‘玄’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 어찌 <도덕경>을, 아니 노장사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들이 ‘현’을 처음으로, 아니 자주 접하는 경우는 “하늘天 따地 검을玄 누를黃...” 으로 시작되는 <천자문>에서이다. <천자문>은 기초 한자 1천자를 익히는 방법인데 이것 말고도 여러 가지 천자문들이 있지만 “하늘天 따地...” 시작하는 <천자문>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다른 종류의 천자문들이 존재하는 것은 한자 천자를 익히는데도 나름대로의 철학이 그 안에 숨어 있어서이다. 한자만 익히는 것이 아니라 한자를 익히면서 동시에 조상들의 깊은 사상을 접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볼 때 “하늘天 따地...”로 시작하는 <천자문>의 구성도 선조들의 전통적 사상이 스며들어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 “하늘天 따地 검을玄 누를黃...”에서 문맥적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하늘天 따地’로 시작하면 그 다음은 냇江 묏山 쯤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갑자기 ‘검을玄’과 ‘누를黃’으로 색깔과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 또 색깔을 언급하더라도 ‘검을玄’이면 그 다음은 ‘흰白’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누를黃’이 나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검다’는 보통 ‘黑’으로 표시되는데 천자문에서는 ‘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왜 이런 식으로 천자문이 구성되었을까? 그런데 이런 의문을 풀면서 우리는 노장사상의 진수를 발견하게 된다. 
먼저 ‘玄’이 의미하는 바가 과연 무엇일까? ‘玄’의 상태는 ‘검다’기 보다는 ‘거무스레하다’는 쪽에 더 가깝다. 하루 시간으로는 깜깜한 밤이 아니라 어둠 속에 희미한 빛이 감지되는 그런 어두움의 시간이다. 그렇다면 마치 해뜨기 전이나 해지고 난 후의 상황과도 같다. 이 시간에 누군가 앞에 있어도 그가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한다. 단지 무언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 따름이지 구체적으로 그 ‘존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바로 이 상태, 즉 감각기관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모든 것이 희미하게 보이는 상태가 유불선으로 대표되는 동양사상이 가장 중요시 하는 상태이다.
유가에서 ‘예순이면 耳順’이라고 한 것도 감각기관으로부터 해방되어야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불가 금강경의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則是空 空則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도 마찬가지 이치를 말한다. 따라서 ‘玄’의 상태로서 사물이나 대상을 보는 것이 우리들 마음공부의 궁극적 목표인 셈이다. 이 상태가 되면 우리들 앞에 있는 대상이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거나, 많다거나 적다거나, 또는 싫다거나 좋다거나 하는 식의 구분이 생겨나지 않으며, 모든 것이 다 똑같이 느껴지는 평정심의 단계로 들어선다. 우리들 욕심이란 결국 이런 감각기관의 작용에 따른 구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 구분의 단계를 천자문은 ‘누를黃’으로 표현하고 있다. ‘누른 색’은 모든 것을 비추는데 모든 것이 ‘누른 색’에 의해 비추이게 되면 우리들 앞에 있는 대상에 따라 더럽거나 깨끗하거나, 많거나 적거나, 또는 싫거나 좋거나 하는 식의 구분이 생겨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구분을 통해 자신을 내세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 좋은 옷, 더 맛있는 음식, 더 큰 집에 대한 집착이 모두 이런 구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우리들 앞에 있는 대상에 대한 구분을 가져다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존재를 부정하는 순간 나 자신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당신이고, 당신도 나라는 식’으로 살아간다면 과연 어찌 되겠는가? 이런 식의 생각이라면 마음공부도 내가 할 필요 없이 당신이 해도 좋다는 논리의 비약마저 생겨날 수 있다. 이 때문에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존재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단계를 가장 바람직한 마음공부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좌선을 하면서 만나는 단계도 바로 이런 ‘玄’의 단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져본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천자문>에선 ‘검을玄’을 “하늘天 따地” 바로 뒤에 놓고, <도덕경>에선 제 1장의 결론으로서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라고 ‘玄’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