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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탁 칼럼 염화시중의 미소’가 뜻하는 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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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진 조회 7,334회 작성일 2011-01-07 13:13

본문

“世尊(세존: 석가모니를 의미함)께서 영산의 법상에 오르시니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 아무 말씀도 않고, 꽃잎 하나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자 다들 의아하게 좌우를 둘러보는데 오직 한 사람 迦葉(가섭) 존자만이 혼자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우리에게 ‘염화시중의 미소’로서 알려진 이 설법은 불교 禪宗(선종)의 최초 법설입니다. 이 내용을 요약하면 (세존께서는) 말을 통하지 않고 마음으로 전했으며, (가섭 존자는) 이를 미소로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즉 가섭 존자만이 ‘말로서 세울 수 없는(不立文字)’ 불가의 미묘한 법문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진리란 언어를 초월하고 있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염화시중의 미소’가 왜 선종의 최초 법설이 되었을까요? 아마도 선종은 불법의 전달방식으로서 특별히 以心傳心의 방식을 설정하고, 이것이 불립문자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라고 보아지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敎宗(교종)은 선종과는 반대의 길을 가고 있어서 많은 경전을 낳게 되지요.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등의 경전들이 이런 결과들이고,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이 경전들을 모두 모아놓은 것이지요.
선종과 교종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 공부 방법인 지에 대해 말하기는 힘듭니다. 어쩌면 두 가지 공부 방법을 병행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요.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 할 때 책도 필요하고, 또 책에서 배운 내용을 마음을 조용히 가다듬어 생각해 볼 시간도 필요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지만 선종은 역사적으로 볼 때 언어와 논리를 통한 적극적 교설의 방식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배제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선종은 왜 이렇게까지 했어야만 했을까요? 이는 진리란, 즉 불교의 법문이란 維摩(유마)의 위대한 침묵 속에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중국의 六朝(육조) 시대에 空(공)에 집착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경전을 비방하며, 문자마저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생겨났습니다. 물론 이런 극단적인 자세는 바람직스럽지 않지만 이런 태도에서 ‘미디어 만능시대’, 또는 ‘언어 만능시대’인 오늘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예지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찰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일주일 묵언하는 마음공부’도 이런 예지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행위는 누가 뭐라 해도 의사소통(커뮤니케이션) 행위일 것입니다. 의사소통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할 수 있고, 또 상대방의 생각을 알 수도 있습니다. 물론 동물도 이런 식의 의사소통을 하지만 우리들의 방식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동물과 달리 우리들은 ‘언어’라는 미디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를 매개로 하면 오감만 갖고서 하는 표현방식과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사실 언어 사용 때문에 인간이 인간다워진 것이고, 그 결과물들이 종교, 사상, 과학, 문학, 예술 등 인류의 모든 자산들입니다.
언어란 결국 우리들 감각기관의 연장입니다. 말은 우리들 청각의 연장이고, 글은 우리들 눈의 연장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언어와 문자와 같은 미디어에 대한 평가를 두고 동양과 서양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합니다. 즉 서양 문명은 언어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바탕으로 성립되었다면 동양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그래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는 법설도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법설은 서양인의 눈에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지만 우리들은 언어 뒤에 숨어 있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이해할 때마다 이전과는 달리 새로운 의미로서 해석하게 되는데 이렇게 달라질 때마다  마음공부는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지요. 
어쩌면 의사소통 방식의 차이, 즉 언어라는 미디어를 어떻게 취급하는 방식에 따라 서양인과 동양인의 기본적 의식과 사상이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를 감히 할 수 있는 것은 서양을 대표하는 기독교와 동양을 대표하는 불교의 말씀 전달 방식에서도 큰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기독교는 신약의 요한복음 제 1장 구절처럼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로 상징화 할 수 있다면 불교는 염화시중의 미소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태초에 말씀이 없었느니라”로 상징화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