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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탁 칼럼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의 오늘날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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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진 조회 1,465회 작성일 2011-01-07 13:10

본문

4월은 우리들에게 특별한 달입니다. 대종사님이 대각하신 달이면서 우리들 공동의 생일에 해당하는 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월의 첫 신문이 좀 특별해야 하지 않느냐는 편집장 부탁도 있어서 우리들에게 가장 친숙한 최초 법어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에 대해 의사소통을 전공하는 학자로서의 소견을 피력해 보고자 합니다.
지난번 글에서 불교 선종의 최초 법어에 해당하는 ‘염화시중의 미소’에 대해 말씀 드린바 있습니다. 그런데 대종사님의 최초 법어와 선종의 최초 법어 사이에는 놀랄만큼 어떤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교도님들께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의사소통의 관점에서 보면 그 연결고리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염화시중의 미소에서 석가모니 부처께서 강조하신 바는 언어를 초월한 의사소통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언어를 떠나서 어떤 의사소통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언어가 매개된 의사소통을 통해서 상대방에게 우리들 생각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 지에 대해선 어떤 의문도 갖지 않습니다. 사실 언어의 편리성 못지않게 언어가 우리들에게 가져다주는 폐해도 편리성 못지않게 큰 것이 사실입니다. 바로 이런 문제점을 세존께서는 염화시중의 미소라는 법어를 통해 강조했던 것입니다.
염화시중의 미소가 의미하는 바를 ‘제품’과 ‘포장’의 관계로서 설명하면 제품의 내용이 중요하지 그 포장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좋은 제품은 요란한 포장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즐겨 찾게 됩니다. 바로 이 단계가 不立文字 내지는 以心傳心의 단계입니다. 이를 마음공부와 관련지으면 마음 씀씀이가 중요하지 그 마음 씀씀이를 상대방에게 어떻게 나타내느냐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마음공부에 정진하는 것도 마음이라는 제품의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이지 제품의 ‘겉모습’을 꾸미기 위한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마음공부 그 자체보다는 마음공부를 꾸미는데 더욱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어떻게? 바로 미디어를 동원해서입니다. 첫 번째로 들 수 있는 미디어가 돈입니다. 돈이란 물질적 가치를 수량화한 ‘미디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십만원은 만원보다 10배의 가치를 지니는 미디어이지만 우리들 마음에서는 이런 식의 미디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들 마음에서는 십 만원과 만원은 같은 가치일수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만원이 십만원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물질적 가치를 돈이라는 미디어로 환원할 때 우리들 마음을 세속적인 잣대로 스스로 구속하는 경우가 생겨납니다.
두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미디어가 언어입니다. 언어는 돈이라는 미디어에 비해 그 폐해가 훨씬 심각하다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저와 관련된 예를 하나 들어보면... 저를 ‘교수’라고 소개할 때와 ‘교사’라고 소개할 때 저를 표현하는 이런 포장으로부터 제 마음이 구속될 수 있지요. 교수라고 소개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지요. 그런데 교수와 교사 사이에 어떤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똑같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인데요. 단지 차이가 있다면 가르치는 학생들이 대학생과 초중고학생 차이인데 그것이 그렇게 큰 차이일까요?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입니다. 온갖 미려사구를 동원해서 자신을 소개하는가 하면 그것도 부족해서 비싼 옷, 큰 집, 좋은 자동차 등을 통해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려고 합니다. 이 때 옷, 집, 차 등은 자신을 표현하는 또 다른 언어입니다. 오늘날 우리들 문명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면 한마디로 이런 식 언어들의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대종사님의 최초 법어는 우리들에게 더욱 새롭게 다가옵니다. ‘물질이 개벽되니’를 ‘자신을 포장하는 기술, 즉 미디어 기술이 크게 발전하니’로 바꿀 수 있다면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들 마음이라는 인격(제품)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은 자연 뒷전에 처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편리하고 쉬운 인격 포장 기술만이 물질문명의 이름으로 더욱 판을 치게 되겠지요. 대종사님이 최초법어를 통해 통렬히 지적하고자 했던 바가 바로 이런 ‘무뉘만’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