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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탁 칼럼 장자 ‘나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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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진 조회 3,139회 작성일 2011-01-07 13:29

본문

한국이 낳은 작곡가 윤이상 선생은 ‘나비의 꿈’이라는 오페라를 만들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야말로 ‘나비의 꿈’ 하나로 단박에 세계적 대열에 끼인 셈이지요. 그런데 오페라 ‘나비의 꿈’은 장자의  「제물론」 마지막 글 ‘나비의 꿈’에서 착상을 얻었습니다. 이 ‘나비의 꿈’ 이야기는 워낙 유명한지라 장자를 가리켜 옛부터 ‘몽접(夢蝶)주인’이라고까지 부르기도 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나비꿈 선생’에 해당하는데 도대체 어떤 이야기이길래 윤이상 선생을 세계적 반열에 오르게 했는지 한번 살펴보지요.

...어느 날 장주(장자)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하게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깨닫지 못했다. 문득 깨어나 보니 틀림없는 장주가 아닌가. 도대체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을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일까?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런 변화를 일러 ‘사물의 변화(物化: 물화)’라고 한다.

이 이야기에는 한 가지 꿈 이야기가 아니라 두 가지 꿈 이야기가 있습니다. 즉 ‘(장자가) 나비가 되는 꿈’과 ‘나비가 (장자가 되는) 꿈’입니다. 먼저 ‘나비가 되는 꿈’은 장자가 꿈에서 나비였는데 그 꿈에서 깨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지금 꿈에서 깨어난 상태를 다시 꿈꾸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나비가 (장자가 되어) 꾸는 꿈’에 해당합니다. 이는 깨어남에서 다시 한번 깨어났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장자가 ‘나비의 꿈’ 이야기를 통해 강조하고자 했던 바는 ‘인생은 일장춘몽’이라는 식의 자포자기가 아닙니다. 물론 인생을 일장춘몽이라고 생각하면 모든 욕심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지만 그 때는 이미 시기가 늦었다고 보아야 하지요. 그래서 마음공부를 통해 인생의 참된 의미를 미리미리 깨닫도록 하는 원불교 정신에 더욱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자는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장자가 보는 세계관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을 모든 사물이 서로 얽히고 설킨 관계, 서로 어울려 있는 관계, 그리고 꿈에서 보는 세계와 같이 서로가 서로가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들어가기도 하고, 서로에게 나오기도 하는 ‘꿈  같은 세계’로 보았습니다. 이런 세계는 각각의 사물이 독특한 정체성과 함께 ‘하나’라는 전제 안에서 서로가 서로가 될 수 있는 不二性(불이성)이 병존하는 세계이지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모든 경계로부터 해방 된 사람은 지금 읽고 있는 신문지에서도 구름도 만날 수 있습니다. 구름이 없으면 비가 생겨나지 않고, 비가 없으면 나무가 자랄 수 없고, 나무가 없으면 신문지가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 뿐만이 아니지요. 신문지가 타면 재가 되므로 종이에서 재를 볼 수 있고, 또 탄소도 볼 수 있고, 급기야는 다이아몬드까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한 장의 신문지에는 우주에 널려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게 장자가 말하는 ‘사물의 변화(물화)’입니다.
세상의 이치와 우주의 원리는 이러합니다. 그럼에도 서로 잘났다고 뽐내려 하는 우리들 마음 씀씀이는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혹시 헐뜯는 사람을 만나기라도 하면 우리들 표정은 금방이라도 굳어집니다. 심지어 우리들은 마음 속에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식으로 구분해서 상대를 대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식의 편협한 마음을 갖고서 혹시 우리들이 꿈에 나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아마도 기겁해서 깨어날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나비가 될 수 있는가 항변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장자는 훨훨 날라 다니는 나비의 여유로움을 부러워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나비가 되어서 장자가 된 꿈을 꾸고 있다는 생각까지도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과 나비 사이에 놓여 있는 경계를 철저히 무너뜨린 셈이지요. 이런 경우 우리들의 삶은 고통이 아니라 유쾌한 나들이 그 자체일 것입니다. 이것은 큰 깨달음(대각)을 이루었을 때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무엇보다 우리들은 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감각기관의 미망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감각기관이 경계를 만들어내고, 그 경계를 심화시킵니다. 그래서 장자는 감각기관의 헛된 미망을 ‘나비의 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꿈의 상태를 빌려 우리가 나비가 될 수도 있고, 또 나비가 우리가 될 수 있다는 식으로요.
그런데 우리가 꿈을 꾸고 있을 때는 감각기관이 잠들고 있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 비로소 우리들은  감각기관의 미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감각기관이 만들어내는 모든 경계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드문 기회입니다. 그리고 설령 꿈에서 깨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또 하나의 꿈을 꾸는 상태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야만 감각기관의 미망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실제로 꿈을 꿀 때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깨어 있는 상태를 또 하나의 꿈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새로운 깨어남이 올 때에 비로소 그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꿈을 꾸어 가면 언젠가는 깨어 있는 모든 순간들이 꿈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큰 깨달음(대각)으로 가기 위해 커다란 꿈(대몽)을 꾸고 있는 상태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