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그인후 글쓰기 버튼이 나타납니다. 이용에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김정탁 칼럼 신축 서울회관을 시대담론의 중심 건물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운영진 조회 1,793회 작성일 2011-01-07 13:29본문
뉴욕하면 우리들 머리 속에 자유의 여신상이 금방 떠오릅니다. 런던은 템즈강 옆 의회와 버킹검 궁이지요. 파리는 개선문과 에펠탑, 모스크바는 크레믈린궁, 북경은 천안문 광장이리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상징은 도시의 모든 것을 한마디로 말해줍니다. 그래서 도시의 경쟁력은 곧 상징의 경쟁에서 나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서울입니다. 서울을 대표할만한 상징이 없어서이지요. 사실 서울은 뉴욕, 런던, 파리, 동경에 비해 하나도 못할 것이 없습니다. 실제에서는 오히려 이들 도시들을 압도하고 있는 데도 말입니다. 거리는 깨끗하지요, 대중교통은 편리하지요, 치안까지 안정되어 밤의 생활도 여유가 있지요. 그렇지만 그 어떤 것도 서울의 자연환경에는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는 북한산, 시내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는 남산, 그리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청와대 뒷산들 이것들은 가히 일품입니다. 세계 어느 메트로폴리탄 급 도시를 가더라도 이런 아름다운 산들을 시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서울뿐입니다.
또 한강을 보노라면 우리들 마음이 얼마나 푸근해집니까? 파리의 세느강은 한강에 비하면 그야말로 개천입니다. 한강의 넓고 시원한 강폭과 그 안에 넘치는 물은 세느강은 물론이고, 세계 어느 강도 따라오지 못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낳고 자라 서울의 이런 환경이 얼마나 큰 혜택인 줄 모르는 서울사람들의 무관심이 문제인 것이지요.
그런데 서울사람들의 무관심만이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교화와 관련하면 우리 교도들의 무관심도 서울사람들 무관심을 뺨칩니다. 소태산 대종사가 펴신 교리가 서울의 자연환경처럼 빼어난데도 그 빼어남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는지 남들에게 이 빼어난 교리를 전하는 데는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지난 십여 년 간 우리의 초라한 교화성적표 때문입니다.
물론 교도 한 사람을 늘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지 저도 공감합니다. 제자 몇 사람을 교당에 데려왔지만 교도로 만드는 데는 결국 실패했습니다. 실패한 이유는 단지 하나입니다. 제자들 의식 속에 아직 원불교가 뿌리 내리지 못한 탓입니다. 기독교도가 아닌데도 일요일에 원불교 교당을 가자고 권하는 일이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그만큼 일요일=교회라는 의식이 우리 사회에 일반화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백 년 전, 아니 50년 전에도 이런 의식이 우리 사회에 일반화 되어 있었을까요? 당시만 하더라도 서양 종교인 천주교와 기독교는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종교였지요. 그래서 한동안 손님처럼 매우 낯설어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이제는 손님에서 주인으로 그 위치가 당당히 바뀌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우리 사회 담론(談論)을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사실 기독교는 이 땅에 들어오자마자부터 우리 사회 담론 형성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구한말에는 열강의 침략에 대해 계몽과 개혁운동으로,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으로, 건국 후에는 민주화운동으로 그 시대 흐름에 맞는 담론을 만들고, 또 그 담론에 맞는 행동을 보여왔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방에 머물던 존재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사회 중심에 위치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서양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우리 사회의 코드를 제대로 읽어낸 결과이지요. 이 점은 원불교, 천도교와 같은 민족종교는 물론이고, 불교, 유교와 같은 전통종교가 크게 반성할 대목입니다. 이런 것을 교훈 삼아 원불교도 새로운 담론을 만드는데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담론은 환경문제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산업화 결과로서 심각한 환경문제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그 환경문제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곳이 원자력발전입니다. 몇 년 전 부안 핵 폐기장 사태에서 극명하게 드러났지요. 그 때 원불교를 비롯한 각 종교단체가 얼마나 앞장서서 반대했습니까? 그럼에도 반대를 잠재울만한 대안은 여전히 미미합니다. 전기를 아껴서 쓰자는 정도인데 그러면서도 우리네 각 가정에선 흥청망청 전기를 사용합니다. 이렇게 전기를 마구 쓰는 나라는 선진국 중에서 아마 우리네뿐 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안합니다. 흑석동 서울회관을 다시 지어야 한다는 담론이 우리 교단 내에 서서히 일고 있는데 이왕 지을 바에는 가장 친환경적인 건물이 되었으면 하고 말입니다. 좀 지나친 요구일는지 모르지만 여름에는 에어컨이 필요 없고, 겨울에는 난방장치가 필요 없는 그런 친환경적 건물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기술로 부족하면 세계적인 건축가에게 의뢰해서라도 전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으뜸가는 친환경적 건물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야만 서울회관이 환경 담론의 중심에 위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친환경적 건물의 대표 주자로 위치해야만 각종 언론매체에서 주목합니다. 건축물과 관련해서 환경문제가 제기되면 텔레비전 화면에는 서울회관 모습이 자동적으로 등장하겠지요. 그러면 우리 교단 홍보는 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또 원불교 상징으로서 역할도 훌륭히 수행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장 의미 있는 역할은 환경문제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는 그럼으로써 말과 실천을 함께 하는 종교로서 원불교가 사람들에게 깊게 각인되도록 하는 역할이 되겠지요.
지금의 서울회관 자리가 올림픽 대로변에 위치해서 하루에도 수십 만 명이 지나가기 때문에 이런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또 환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장 결혼하고 싶은 장소로까지 만들 수 있으면 그 목표는 더욱 빨라질 것입니다. 게다가 한강의 아름다운 모습과 어우러지면 이런 효과는 더욱 빨리 나타날 수 있으로 전망합니다. 그러면 지난 50년 이상을 명동 천주교 성당이 한국 사회에서 해 왔던 역할은 서울회관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문제는 서울입니다. 서울을 대표할만한 상징이 없어서이지요. 사실 서울은 뉴욕, 런던, 파리, 동경에 비해 하나도 못할 것이 없습니다. 실제에서는 오히려 이들 도시들을 압도하고 있는 데도 말입니다. 거리는 깨끗하지요, 대중교통은 편리하지요, 치안까지 안정되어 밤의 생활도 여유가 있지요. 그렇지만 그 어떤 것도 서울의 자연환경에는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는 북한산, 시내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는 남산, 그리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청와대 뒷산들 이것들은 가히 일품입니다. 세계 어느 메트로폴리탄 급 도시를 가더라도 이런 아름다운 산들을 시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서울뿐입니다.
또 한강을 보노라면 우리들 마음이 얼마나 푸근해집니까? 파리의 세느강은 한강에 비하면 그야말로 개천입니다. 한강의 넓고 시원한 강폭과 그 안에 넘치는 물은 세느강은 물론이고, 세계 어느 강도 따라오지 못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낳고 자라 서울의 이런 환경이 얼마나 큰 혜택인 줄 모르는 서울사람들의 무관심이 문제인 것이지요.
그런데 서울사람들의 무관심만이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교화와 관련하면 우리 교도들의 무관심도 서울사람들 무관심을 뺨칩니다. 소태산 대종사가 펴신 교리가 서울의 자연환경처럼 빼어난데도 그 빼어남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는지 남들에게 이 빼어난 교리를 전하는 데는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지난 십여 년 간 우리의 초라한 교화성적표 때문입니다.
물론 교도 한 사람을 늘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지 저도 공감합니다. 제자 몇 사람을 교당에 데려왔지만 교도로 만드는 데는 결국 실패했습니다. 실패한 이유는 단지 하나입니다. 제자들 의식 속에 아직 원불교가 뿌리 내리지 못한 탓입니다. 기독교도가 아닌데도 일요일에 원불교 교당을 가자고 권하는 일이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그만큼 일요일=교회라는 의식이 우리 사회에 일반화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백 년 전, 아니 50년 전에도 이런 의식이 우리 사회에 일반화 되어 있었을까요? 당시만 하더라도 서양 종교인 천주교와 기독교는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종교였지요. 그래서 한동안 손님처럼 매우 낯설어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이제는 손님에서 주인으로 그 위치가 당당히 바뀌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우리 사회 담론(談論)을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사실 기독교는 이 땅에 들어오자마자부터 우리 사회 담론 형성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구한말에는 열강의 침략에 대해 계몽과 개혁운동으로,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으로, 건국 후에는 민주화운동으로 그 시대 흐름에 맞는 담론을 만들고, 또 그 담론에 맞는 행동을 보여왔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방에 머물던 존재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사회 중심에 위치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서양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우리 사회의 코드를 제대로 읽어낸 결과이지요. 이 점은 원불교, 천도교와 같은 민족종교는 물론이고, 불교, 유교와 같은 전통종교가 크게 반성할 대목입니다. 이런 것을 교훈 삼아 원불교도 새로운 담론을 만드는데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담론은 환경문제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산업화 결과로서 심각한 환경문제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그 환경문제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곳이 원자력발전입니다. 몇 년 전 부안 핵 폐기장 사태에서 극명하게 드러났지요. 그 때 원불교를 비롯한 각 종교단체가 얼마나 앞장서서 반대했습니까? 그럼에도 반대를 잠재울만한 대안은 여전히 미미합니다. 전기를 아껴서 쓰자는 정도인데 그러면서도 우리네 각 가정에선 흥청망청 전기를 사용합니다. 이렇게 전기를 마구 쓰는 나라는 선진국 중에서 아마 우리네뿐 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안합니다. 흑석동 서울회관을 다시 지어야 한다는 담론이 우리 교단 내에 서서히 일고 있는데 이왕 지을 바에는 가장 친환경적인 건물이 되었으면 하고 말입니다. 좀 지나친 요구일는지 모르지만 여름에는 에어컨이 필요 없고, 겨울에는 난방장치가 필요 없는 그런 친환경적 건물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기술로 부족하면 세계적인 건축가에게 의뢰해서라도 전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으뜸가는 친환경적 건물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야만 서울회관이 환경 담론의 중심에 위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친환경적 건물의 대표 주자로 위치해야만 각종 언론매체에서 주목합니다. 건축물과 관련해서 환경문제가 제기되면 텔레비전 화면에는 서울회관 모습이 자동적으로 등장하겠지요. 그러면 우리 교단 홍보는 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또 원불교 상징으로서 역할도 훌륭히 수행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장 의미 있는 역할은 환경문제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는 그럼으로써 말과 실천을 함께 하는 종교로서 원불교가 사람들에게 깊게 각인되도록 하는 역할이 되겠지요.
지금의 서울회관 자리가 올림픽 대로변에 위치해서 하루에도 수십 만 명이 지나가기 때문에 이런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또 환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장 결혼하고 싶은 장소로까지 만들 수 있으면 그 목표는 더욱 빨라질 것입니다. 게다가 한강의 아름다운 모습과 어우러지면 이런 효과는 더욱 빨리 나타날 수 있으로 전망합니다. 그러면 지난 50년 이상을 명동 천주교 성당이 한국 사회에서 해 왔던 역할은 서울회관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하지 않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