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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탁 칼럼 불교와 노장의 귀착점에 원불교가 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조회 1,952회 작성일 2013-08-12 12:13

본문

제목: 불교와 노장의 귀착점에 원불교가 있다.

대담자: 소광섭 서울대학교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나노프리모연구센터장
         
        김정탁 성균관 대학교 소통학 교수


물리학자와 커뮤니케이션 학자가 만났다. 각자의 전공을 바탕으로 동양 종교와 사상에 주목해 온 두 석학은 공히 미래의 종교로 원불교를 꼽는다.
    물론 그들이 원불교를 신앙하는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각자의 전공과 동양 사상을 근거로 할 때, 원불교의 합리적 신앙은 그만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원불교의 현주소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내는데….
‘4백 년 뒤, 원불교는 세계적 주세교단이 될 거라는데 의심을 걸지 않는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김정탁 교수(이하 김) 소 교수님이 월간<원광>에 ‘형이상학과 물리학 그리고 불교’란 주제로 연재해 주셔서 불교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요즘 장자사상에 빠져있는데요. 중국 선불교는 인도의 대승불교와 중국의 전통사상인 노장사상이 결합되어 만들어졌다는 게 일반적 통념입니다.
그래서 저는 노장사상의 원류인 장자사상을 통해 원불교 교리에 접근해보고자 ‘玄, 장자와 소통’이란 주제로 연재 중입니다. 
    소광섭 교수(이하 소) <장자>를 보면 사상의 자유로움과 문학적 예화가 매우 매력적이죠.
특히 <장자>의 시작인 소요유(逍遙遊)에 나온 ‘붕(鵬)’의 시원하고 웅장한 날갯짓을 보면 <대종경> 법문이 떠오릅니다.
‘대종사께서 선원 대중에게 “누가 이 가운데 허공법계를 완전히 자기 소유로 이전 증명 낸 사람이 있느냐.”’(<대종경> 성리품 26장)고 물으시는데, 이 경지에 오른 사람이 소요유에서 말한 구만리 창공을 날아가는 붕의 심정이지 않을까 싶어요.
    김> 이런 소요유의 상태는 불교에서 말하는 각(覺)의 상태입니다.
장자는 각이란 철학적·관념적 상태가 아닌 가장 일상적인 상태로 표현했습니다.
소요유(逍遙遊, 자유롭게 노님)란 세 글자에 모두 책받침(  )이 있는 것도 자유로움이 내재해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런 해석이 원불교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준다고 봅니다. 대종사께서 생활불교를 강조했는데, 각이란 이론적·학문적 대상인 동시에 생활 속에서 불법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봅니다.
    소 저는 생활 속의 삶을 강조하는 게 유교이고, 자연적 삶을 강조하는 게 노장사상이라 생각했는데 새로운 해석이네요. 새롭고 창의적이에요.
    김 소요유 내용을 보면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바람이 일어나니 큰 새로 변해서 남쪽으로 날아간다고 했잖아요. 저는 지금껏 ‘바람이 일자 왜 물고기가 붕으로 변했을까.’ 하고 의문이 들었지만 그다지 큰 의미는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게 장자식 각의 상태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람이 일었다는 것 자체가 곧 각이란 걸 알게 된 거죠. 바다 속에 가라앉아있을 때는 절대 큰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하늘 높이 날아야 완성된 인간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이죠. 장자는 그걸 물고기가 붕으로 변한다는 식의 문학적 표현을 쓴 것입니다. 
    소> 신문방송학과 교수로서 이처럼 장자사상에 깊이 빠지게 된 이유가 있었을 것 같은데 장자와 소통은 어떤 관계가 있나요?
    김> 미국에서 커뮤니케이션학을 공부하면서 한계를 많이 느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불·도 삼교에는 커뮤니케이션의 원초적 수단인 감각과 감각의 연장에 해당하는 언어 및 문자가 핵심을 관통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유가에선 완성된 인간의 모습을 이순(耳順)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단순히 귀가 순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소리가 같이 들리는 경지를 의미합니다.
즉 완성된 인간의 목표를 감각의 미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상태로 본 것이죠.
이를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장자> 첫 장인 소요유는 장자서의 서론이자 동시에 결론이라면,
 제물론은 이론적 틀로써 우리의 감각과 언어의 조건이 과연 믿을 만한가를 묻고 있습니다. 장자는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소요유 상태가 되려면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불가의 핵심은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입니다.
 제가 볼 때는 오온(五蘊)인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커뮤니케이션을 구성하는 요소인데 색은 대상, 수는 감관(感官)작용, 상·행·식은 심관(心官)작용이지요. 불가에서는 감관 및 심관작용을 멈추고 공(空)한 상태로 놓아두라고 말합니다.
그래야만 해탈에 이를 수 있습니다. 유불선 사상이 모두 우리들 커뮤니케이션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저의 공부가 새롭게 전개된 것입니다.
    소> 김 교수님의 말처럼 인식이 커뮤니케이션의 근본이잖아요. 문제는 인간은 육근을 통해 인식을 하는데, 이 육근의 인식체계 밖에 더 근본적인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죠. 감각적 인식과 그것의 커뮤니케이션에 따른 근본적 문제가 언어에 있다는 것이 장자나 불교가 공통으로 제시하는 주제인 것 같습니다.
    김> 지금 교단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신약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대종사님의 법은 당시 혁신이었습니다. 그 법을 이 시대와 대중에 맞게 전달해야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굉장히 퇴보해가고 있다고 봅니다. 사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마음공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그 방법을 설명해 주자는 것입니다. 저는 그 방법 중 하나가 ‘우리가 한 순간도 빠짐없이 행하는 커뮤니케이션을 어떻게 해야만 내가 미망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를 생활 속에서 직접 마주하는 것이 마음공부라고 생각합니다.
    소> 마음공부가 감정 제어하는 데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러면 대인관계도 좋고, 감정조절도 잘돼요. 그러나 이 정도라면  상담심리 수준에 그치고 말아요. 원불교 마음공부는 분명 자기계발 서적과는 원천적으로 다른 점을 제시해야지요. 그것이 바로 곤에서 붕으로의 탈바꿈, 또는 대각(大覺)이란 목표와 연결될 때 가능하다고 봅니다. 마음공부가 제시하는 것은 자기의 마음을 봄으로써 그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탐진치에 휘둘린 마음이 평온을 찾음으로써 인식에 변화를 가져와 실상을 올바르게 보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마음공부를 통하여 탐진치를 제거하는 것이 진정한 ‘참회’라 할 수 있지요. 마음공부는 <정전> 참회문이 제시한 성불제중의 구체적 훈련 방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간단해 보이는 마음공부지만 거기에는 언어, 인식, 참회의 원리가 다 관여되어 있지요.
    김> 인간의 원초적 커뮤니케이션 수단인 감각기관이 만들어내는 탐·진·치심이 하나 정도에 불과하다면, 감각의 연장인 언어와 문자가 만들어내는 탐·진·치심은 몇 배나 더 크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똑같은 옷이라도 브랜드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두고 사람들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런 거지요. 소비사회론으로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 Baudrillard)는 지금 시대를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때 소비는 제품의 소비가 아니라 기호의 소비를 뜻합니다. 이처럼 현대인들은 언어가 만들어낸 미망에 의해 기호소비가 더욱 심해져서 마음공부가 예전보다 더 힘들어진다고 봅니다. 그래서 탐·진·치심의 근원을 찾아가다보면 언어가 만들어낸 미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신약이 시급히 개발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소> 그럼 김 교수님이 말하는 마음공부의 중요한 포인트가 상대의 말로 인해 상처를 받지 않는다는 것인가요? 
    김> 유불선 사상에서는 인식이란 단어를 부정적으로 보기에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반면 서양에서는 인식이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자주 언급됩니다. 그런데 인(認)이란 글자를 파자해보면 말씀 언(言) 변에 칼 도(刀), 마음 심(心)으로 이루어집니다. 언어가 우리의 가슴을 파서 상처를 입게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식(識)은 말씀 언(言) 변에 소리 음(音), 그리고 창(戈)을 씁니다. 언(言)과 음(音), 이 두 개가 서로 싸운다는 뜻입니다. 즉 인공적인 언어와 소리는 자꾸만 싸움을 일으키고, 마음의 상처를 주고, 마음의 분란을 일으키는 것이니 경계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마음공부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소> 인식이란 말을 서양과 동양이 보는 관점이 많이 다르군요. 서양에서는 어떻게 아느냐, 그럼 그 아는 것이 진리냐, 그 아는 것의 한계가 무엇이냐, 근거는 무엇이냐고 따져 들어가는 것이 서양의 인식론이었죠. 물론 앎과 언어는 밀접한 관계가 있죠.
    김>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의 차이는 처음에는 원래 그다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앎을 중요시하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서양철학의 주축이 되면서 동서양 사상에 있어서 차이가 크게 벌어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서양철학이 논리적 사고를 위해, 또는 의미를 보다 객관화하기 위해 언어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순간부터 동서양 언어관에 있어서 큰 차이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은 의미가 모호한 이집트 상형문자와 같은 표의문자를 버리고 의미가 뚜렷한 알파벳과 같은 표음문자를 선택하게 되었지요. 게다가 그 알파벳 원리도 네/아니오 식의 이항대립을 선택함으로써 논리적 사고를 더욱 용이하도록 만들었지요. 그렇지만 이런 선택이 우리들로 하여금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은 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서양은 유(존재)를 강조하기 위해 무를 동원했는데, 무는 실제에 존재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무라는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마치 무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게 서양존재론이 지닌 한계입니다. 이런 점에서 불가에서 사용하는 공(空) 개념과 도가에서 사용하는 허(虛) 개념은 매우 합리적인 개념입니다. 채워져 있음(충만)의 반대편에 비움(공 또는 허)이 있는데 채움과 비움은 모두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양은 이 비움을 없음(무)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이런 식 논리의 연장으로 등장한 것이 서양 종교에서 말하는 선악(善惡) 개념입니다.
    소> 결국 인식의 문제인데, 이분법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다 알고 있으나 이분법 자체가 틀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이분법에 바탕하여 논리가 서고, 그 위에 수학과 과학이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과학이 제시하는 세계관과 기술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과학은 우리 삶에 실로 엄청난 파워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분별을 부정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이것이 가진 한계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불교의 중도사상이 중요합니다. 이분법적 분별은 보통의 현상에서는 매우 유용하지만 우주의 종말 여부라든가, 하나님의 존재유무와 같은 근본적인 물음에는 전혀 적용될 수 없습니다. 이런 근본적 문제는 언어, 인식 등을 초월한 깨침의 세계입니다. 이것이 석가모니불의 유무중도사상이며, 대종사님의 게송은 이 점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석가모니불의 중도사상을 가장 잘 이어받은 것이 원불교란 뜻이죠. 커뮤니케이션 문제도 이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봅니다.
    김> 저도 소 교수님과 같은 입장입니다. 그래서 언어로써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만용에서 우리들이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들 눈에는 잘 뜨이지 않지만 세상을 구성하는 자연의 결을 제대로 읽어야만 비로소 참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언어는 자연의 결에 따라 구성된 것이 아니라 인공의 결에 따라 구성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언어로서 모든 것을 말하려고 들면 세상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불가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이심전심(以心傳心)이 강조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소> 물론 조심해서 써야할 뿐 아니라 그것이 핵심이라 할 수 있죠. 유와 무로 분리하는 것이 유용하지만, 그것이 전부 인양 오해를 하는 것이 문제이지요. 
    김> 편의상 분리했는데 실제인 것처럼 달리 보게 된 게 문제죠.
    소> 삶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 뭐냐, 그것을 알아내는데 유와 무란 이분법적 사고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이죠.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신이 있다 없다란 이분법적 분별을 마치 책상이 있다 없다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만약 그대로 적용해서 하나님이 있다할 경우 어디 있냐, 언제부터 있었냐고 묻게 되면 계속해서 틀린 질문을 하는 격이 됩니다. 그래서 대종사님의 유무(게송) 사상을 종교연합의 근본 원리로 제시해야 합니다.
    김> 서양은 왜 유일신을 등장 시켰을까요. 이 점은 혼돈(카오스) 상태를 질서(코스모스) 상태로 일관되게 만들어온 서양 문명관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선 코스모스의 축을 제우스 등이 등장했던 신화가 담당했고, 중세에선 신(하나님)이 그 역할을 대신했지요. 지금은 이성의 소산인 과학이 세상을 코스모스하게 만드는 데 앞장서고 있지요. 이에 반해 동양은 카오스를 코스모스와 마찬가지로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기에 굳이 카오스한 상황을 코스모스한 상황으로 만들 필요가 없었지요. 그래서 신과 같은 존재도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자연 그대로의 상태가 카오스이자 동시에 코스모스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소> 신의 등장은 역사적, 환경적 맥락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바라봐야할 문제지만, 중요한 건 현재 원불교가 종교연합(UR)운동을 하고 있는데 이게 단순히 서로 손잡고 좋은 일 하자는데 그쳐선 안 된다는 점입니다. 나는 유일신이고 너는 신을 부정하니까 협력 못한다고 할 때 인식론적 관점에서나 존재론적 관점에서 유와 무가 무엇인지, 또한 당신이 의미하는 것과 우리가 의미하는 것이 어떻게 상통되어 종교연합이 가능한지 정확히 제시해야 합니다. 기독교에서 신이 있다고 믿는 것과 불교에서 깨침을 얻어야 부처가 된다는 것이 본래는 같은 것이나 언어와 인식의 체계가 달라서 달리 말하는 것뿐이라는 걸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저는 원불교 게송이 그걸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봅니다. 게송에 비추어보면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 것이나 없다고 하는 것이나 다 같은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식의 문제, 신의 문제, 종교연합 문제 등이 다 이 한 포인트에 있다고 봐요. 우리 학문하는 사람들이 종교연합(UR)을 위해 열심히 연구하면 원불교가 반드시 해답을 줄 것이라 봅니다.
    김> 저도 소 교수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원불교 교리는 정말로 경쟁력 있는 제품인데 판매마케팅을 잘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문을 닫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대종사께서 교문을 여실 때는 모든 것이 진취적이고 미래지향적이었는데, 또 재가·출가의 구분도 없었다고 했는데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어색해져버린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맞는 신약을 개발하기 위해선 열린 마음으로 논쟁도 활발히 전개해야 하는데 벌써부터 교리가 굳어져서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상황이 돼버린 것 같아요. 이렇게 되면 교리가 화석화된 상태가 되고 마는데 이러면 죽은 종교가 됩니다.   
    소> 미래의 불교는 원불교식으로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원불교는 아직 세력이 약해서 영향력이 적다는 게 문제입니다. 각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재가교도들을 백분 활용하여 원불교가 밖으로 뻗어나가는데 힘을 얻도록 했으면 합니다.
    김>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저는 언어가 만들어내는 미망을 원불교가 거꾸로 활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요즘 사람들은 오감만족이라 하여 말초적 단계에서 자신의 생각을 결정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건물이 우아하다든지, 성직자 옷이 세련되었다든지 하는 것들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교당 건물이나 여성교역자들의 복장은 오늘날의 일상적 코드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제가 가능성을 보았는데 미국에 있는 원다르마센터 법당이 그것입니다. 법당에 있는 불단이 아주 현대적이고 기품이 있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빨리 표준화해야 합니다. 이런 우아한 불단은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시급하게 갖출 수 있다고 봅니다. 여기에 개인적 소견을 더하면 대종사님 사진을 법당 앞쪽(불단 옆)에 꼭 걸어두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술성이란 상징성이 높을수록 좋은 것인데 이런 의미에서 사진은 너무 사실적이기에 상징성이 떨어집니다. 이번 원다르마센터 법당에는 대종사님의 사진이 법당 앞에 걸려있지 않았기 때문에 좋은 불단이 나온 것이라 봅니다.
    소> 우리 원불교는 개교 역사에 비해 빨리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변화 속도에 비교하면 마음만큼 성장을 못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 가끔 생각해보는데 그중 하나는 대종사님 재세 시에는 교무님들이 일반인들의 지도자였지만 지금은 사회가 너무 빨리 발전하다보니 리더역할을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대종사님 법에 근거해서 교무님들이 보통 사회인들이 갈망하는 바를 채워 줄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서양에서 명상 지도가 인기를 끄는 것처럼요.
    김> 저는 앞으로 친환경문제가 21세기의 중요한 코드라고 봅니다. 친환경을 거스르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산업사회를 이끌어가는 에너지문제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흑석동 서울회관을 에너지절약형 친환경 건물로 새롭게 만들어서 이 시대의 담론을 주도해 가야 합니다. 열매가 제대로 맺으려면 일단 토양이 좋아야하고, 그 다음 씨도 뿌리고, 비료도 주고, 잡초도 제거해야 하는데 그걸 생략하고 열매 맺기만을 기다리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 교화가 이런 식이라고 봅니다. 교화가 제대로 되려면 사람들이 원불교를 잘 이해하고, 이것이 이루어지면 원불교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되고, 그런 뒤에 입교라는 행동변화가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원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걸 생략하고 태도변화와 행동변화를 유도하려고 하니까 노력에 비해 교화성과가 미미한 것입니다. 원불교를 알리는 가장 효과적인 것이 시대의 담론을 앞장서서 실행에 옮기는 게 아닐까요? 과거 천주교의 민주화운동, 더 멀리는 기독교 항일운동이 그런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시대의 담론은 친환경일 테고, 이 친환경을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리는 효과적 수단이 서울회관의 새로운 모습이 아닐까요?
    소> 재가교도 활용에 있어서도 ‘어떻게, 기쁜 마음으로 자기의 능력을 봉사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적 연구가 필요합니다. 또한 청소년문제도 그래요. 교도들의 자녀도 교당을 재미없어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청소년들을 재밌고 유익하게 해줄 것인가, 그 이유를 알아서 우리가 좀 개선을 하면 좋겠습니다. 재가들이 기여할 수 있는 분야 같은데요.
    김> 새해는 임진년입니다. 새해에는 재가·출가가 일심합력해서 백주년성업의 추진력이 더욱 많이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소> 저는 원불교가 창립 사오백년 대에 세계의 주교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현재도 건전한 종교로 매우 좋게 평가받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원불교처럼 해야한다고 하거든요. 그러므로 급하게 마음을 먹지 말고 정도(正道)에 따라 교무님들은 수행과 교화를 잘 하시고, 교도들의 상황과 능력에 맞게 맞춤식 활용을 잘 해주시면 자연히 발전이 되어나갈 것이라 봅니다. 감사합니다.

주> 위 글은 2011년 12월 3일 월간 <원광>지에서 주최한 원남교당 교도 유산 김효신(속명: 김정탁, 성균관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국언론학회 회장)님과 원불교 교도인 소광섭 서울대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나노프리모연구센터장(전 서울대학교 물리학부 교수)님의  신년대담 글을 옮겨 실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