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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탁 칼럼 [玄, 장자와 소통] 최고 미녀인 서시와 문둥이는 그 모습이 매한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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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 3,007회 작성일 2013-08-12 13:42본문
제목 : 최고 미녀인 서시와 문둥이는 그 모습이 매한가지이다
‘대들보에 쓰는 나무는 지붕을 지탱해야 하므로 그 두께가
두꺼워야 한다. 이에 비해 들에 널린 풀의 줄기는 너무나 가늘어서 그 두께가 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얇다. 그렇지만 도의 관점에서 볼 때는 대들보나 풀의 줄기나 그 두께에 있어서 별반 차이가 없다.
나무의 두께만 그런 게 아니다. 아름다움에 있어서도 도의
관점에선 마찬가지이다. 서시(西施)는 중국 춘추시대 최고의
미녀이다. 어느 정도로 미인이었는가 하면 오(吳)나라에 패한 월(越)나라 왕 구천(句踐)이 미인계를 위해 오나라 왕 부차(夫差)에게 바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구천과 부차는 와신상담(臥薪嘗膽)
이야기를 만들어낸 주인공들이 아닌가. 그럼에도 부차는 서시의
미모에 빠져 결국 오나라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게 된다. 그렇다면
서시는 나라를 기울게 만든, 즉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녀인 셈이다. 이에 비해 문둥이는 서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추하다. 그렇지만 도의 관점에선 별반 차이가 없어 서시든 문둥이든 그 모습에 있어선 매한가지이다.
그런데 도의 관점에서 볼 때 차이가 없다는
사실은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눈과 귀로 함께 보고 듣는 것에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 익살스럽다면 그것은 도의 관점에선 교활함과 백지장 한 장의 차이일 뿐이다. 어찌 보면 교활함도 익살스러움의 연장이라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속임수와 신기함도
그 본질에 있어선 흡사하다. 누군가를 속이려고 들면 신기해야 하고, 또 신기하면 사람들이 잘 속기 마련이다. 따라서 속임수나 신기함도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일 뿐이지 도의 관점에선 매한가지이다.
이제 장자는 그의 관심을 우리들의 감각
작용에서 벗어나 자연현상으로 옮겨 가고자
한다. 즉 감각작용이 도의 관점에선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으로 귀결된다면 사물의 모습도 도의 관점에선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래서 장자는 사물의 나누어짐(分)은 곧
이루어짐(成)이고, 사물의 이루어짐은 곧 허물어짐(毁)이라고 말한다. 장자는 왜 이런 식의 주장을 하는 것일까? 장자에 따르면 우리가 마주하는 사물의 모습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 그 외형만 다르게 나타날 뿐이지 모든 사물의 근본 모습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지만 자연의 근본 모습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삶과 죽음도 이런 식으로 설명될 수 있지 않은가? 흩어진 기(氣)가 합쳐져서 하나의 생명체를 만들고, 또 그 기가 흩어져서 죽음에 이르고, 또다시 흩어진 기가 언젠가 합쳐져서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내고 하는 이런 식 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만물의 모습이 이러하기에 장자는 나누어짐은 합쳐짐이고, 또 합쳐짐은 허물어짐이라고 파악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 만물은 이룸과 허물어짐의 구분 없이 항상 하나로써 통하게 된다. 물론 이런 사실은 다만 통달한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보통 사람들은 사물의 한 단면만을 보고 사물의 합쳐진 모습을 보게 되면 기뻐하고, 흩어진 모습을 보게 되면 슬픈 반응을 보인다. 이제 통달한 사람은 자신을 쓰임(有用)보다는 쓰이지 않음(不用)에 굳이 놔두려고 한다. 그야말로 무용지용(無用之用)의 도를 실천하려는 것이다. 무용지용은 장자사상의 핵심 개념인데 <소요유(逍遙遊)>에서 처음 등장한 뒤에 오랜만에 만나는 말이다. 장자는 <소요유>에서 가죽나무 줄기가 울퉁불퉁하고, 또 가지는 비비 꼬여서 목수들이 거들떠보지 않았기에, 즉 무용(無用)했기에 오래도록 베어지지 않고 클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 나무는 이제 사람들에게 한가로이 쉴 넓고 편안한 공간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것이 ‘쓸모없는 것의 쓸모 있음’의 무용지용인 셈이다. 그래서 무용지용의 도를 터득한 사람, 즉 달인(達人)은
‘드러나지 않은 평상시의 자연스런 상태(諸庸제용)’ 속에 자신을 놓아두고자 한다. 평상시의 자연스런 상태란 설령 자신이 나누어짐(分)으로, 또는 이루어짐(成)으로, 심지어 허물어짐(毁)으로 나타나더라도 이에 연연해하지 않는 그런 편안한 모습을 의미한다.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자신의 본질이 바뀌지 않는다는 확신이 서 있기 때문에 자연스런 제용의 상태를 유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의 허물어진 모습을 보고서 쓰려고 하지 않으면 빙긋이 웃음만을 보낼 것이고, 자신의 합쳐진 모습을 보고서 쓰려 하면 정중히 거절할 것이다.
이에 반해 보통 사람들은 쓰임을 위해서 노력한다. 그래서 나누어진 상태, 또는 허물어진 부족한 상태를 상대방에게 억지로 숨기려 들고, 오로지 이루어짐의 온전한 상태만을 보여주려고 한다. 이는 한마디로 유용지용(有用之用)의 자세이다. 물론 이런 사람은 통달한 사람에 의해 결코 쓰여지지 못할 것이다. 반면에 자신을 무용지용의 도에 놓아둔 사람은 통달한 사람에 의해 반드시 쓰여진다. 왜냐하면 무용지용의 도를 추구하는 사람은 겉모습보다는 항상 속의 내용을 충실히 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자는 드러나지 않은 평상시의 자연스런 상태가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쓰임(用)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런 쓰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결국 ‘통함(通)’에 이르는데 통함에 이르면 곧 도의 얻음(得), 즉 도통(道通)의 단계에 오른다. 그래서 장자는 얻음에 이르면 비로소 우리들이 도에 가까워진다고 말한다.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있는지의 이유에 대해선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가 없어서인 듯 싶은데 그래도 굳이 이유를 들면 ‘그러니까 그런 것(因是)’이다. 인시(因是)란 모든 것을 자연에 맡기고, 시비 판단을 가하지 않는 상태이다. 장자도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런 이치를 자연스럽게 터득했다고 보아진다. 그래서 언급할 필요를 특별히 느끼지 못했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특별한 이유를 언급하는 순간 이미 자신이 도와 멀어지는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 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
[원광지 2012년 05월호]
‘대들보에 쓰는 나무는 지붕을 지탱해야 하므로 그 두께가
두꺼워야 한다. 이에 비해 들에 널린 풀의 줄기는 너무나 가늘어서 그 두께가 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얇다. 그렇지만 도의 관점에서 볼 때는 대들보나 풀의 줄기나 그 두께에 있어서 별반 차이가 없다.
나무의 두께만 그런 게 아니다. 아름다움에 있어서도 도의
관점에선 마찬가지이다. 서시(西施)는 중국 춘추시대 최고의
미녀이다. 어느 정도로 미인이었는가 하면 오(吳)나라에 패한 월(越)나라 왕 구천(句踐)이 미인계를 위해 오나라 왕 부차(夫差)에게 바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구천과 부차는 와신상담(臥薪嘗膽)
이야기를 만들어낸 주인공들이 아닌가. 그럼에도 부차는 서시의
미모에 빠져 결국 오나라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게 된다. 그렇다면
서시는 나라를 기울게 만든, 즉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녀인 셈이다. 이에 비해 문둥이는 서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추하다. 그렇지만 도의 관점에선 별반 차이가 없어 서시든 문둥이든 그 모습에 있어선 매한가지이다.
그런데 도의 관점에서 볼 때 차이가 없다는
사실은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눈과 귀로 함께 보고 듣는 것에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 익살스럽다면 그것은 도의 관점에선 교활함과 백지장 한 장의 차이일 뿐이다. 어찌 보면 교활함도 익살스러움의 연장이라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속임수와 신기함도
그 본질에 있어선 흡사하다. 누군가를 속이려고 들면 신기해야 하고, 또 신기하면 사람들이 잘 속기 마련이다. 따라서 속임수나 신기함도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일 뿐이지 도의 관점에선 매한가지이다.
이제 장자는 그의 관심을 우리들의 감각
작용에서 벗어나 자연현상으로 옮겨 가고자
한다. 즉 감각작용이 도의 관점에선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으로 귀결된다면 사물의 모습도 도의 관점에선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래서 장자는 사물의 나누어짐(分)은 곧
이루어짐(成)이고, 사물의 이루어짐은 곧 허물어짐(毁)이라고 말한다. 장자는 왜 이런 식의 주장을 하는 것일까? 장자에 따르면 우리가 마주하는 사물의 모습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 그 외형만 다르게 나타날 뿐이지 모든 사물의 근본 모습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지만 자연의 근본 모습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삶과 죽음도 이런 식으로 설명될 수 있지 않은가? 흩어진 기(氣)가 합쳐져서 하나의 생명체를 만들고, 또 그 기가 흩어져서 죽음에 이르고, 또다시 흩어진 기가 언젠가 합쳐져서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내고 하는 이런 식 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만물의 모습이 이러하기에 장자는 나누어짐은 합쳐짐이고, 또 합쳐짐은 허물어짐이라고 파악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 만물은 이룸과 허물어짐의 구분 없이 항상 하나로써 통하게 된다. 물론 이런 사실은 다만 통달한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보통 사람들은 사물의 한 단면만을 보고 사물의 합쳐진 모습을 보게 되면 기뻐하고, 흩어진 모습을 보게 되면 슬픈 반응을 보인다. 이제 통달한 사람은 자신을 쓰임(有用)보다는 쓰이지 않음(不用)에 굳이 놔두려고 한다. 그야말로 무용지용(無用之用)의 도를 실천하려는 것이다. 무용지용은 장자사상의 핵심 개념인데 <소요유(逍遙遊)>에서 처음 등장한 뒤에 오랜만에 만나는 말이다. 장자는 <소요유>에서 가죽나무 줄기가 울퉁불퉁하고, 또 가지는 비비 꼬여서 목수들이 거들떠보지 않았기에, 즉 무용(無用)했기에 오래도록 베어지지 않고 클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 나무는 이제 사람들에게 한가로이 쉴 넓고 편안한 공간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것이 ‘쓸모없는 것의 쓸모 있음’의 무용지용인 셈이다. 그래서 무용지용의 도를 터득한 사람, 즉 달인(達人)은
‘드러나지 않은 평상시의 자연스런 상태(諸庸제용)’ 속에 자신을 놓아두고자 한다. 평상시의 자연스런 상태란 설령 자신이 나누어짐(分)으로, 또는 이루어짐(成)으로, 심지어 허물어짐(毁)으로 나타나더라도 이에 연연해하지 않는 그런 편안한 모습을 의미한다.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자신의 본질이 바뀌지 않는다는 확신이 서 있기 때문에 자연스런 제용의 상태를 유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의 허물어진 모습을 보고서 쓰려고 하지 않으면 빙긋이 웃음만을 보낼 것이고, 자신의 합쳐진 모습을 보고서 쓰려 하면 정중히 거절할 것이다.
이에 반해 보통 사람들은 쓰임을 위해서 노력한다. 그래서 나누어진 상태, 또는 허물어진 부족한 상태를 상대방에게 억지로 숨기려 들고, 오로지 이루어짐의 온전한 상태만을 보여주려고 한다. 이는 한마디로 유용지용(有用之用)의 자세이다. 물론 이런 사람은 통달한 사람에 의해 결코 쓰여지지 못할 것이다. 반면에 자신을 무용지용의 도에 놓아둔 사람은 통달한 사람에 의해 반드시 쓰여진다. 왜냐하면 무용지용의 도를 추구하는 사람은 겉모습보다는 항상 속의 내용을 충실히 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자는 드러나지 않은 평상시의 자연스런 상태가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쓰임(用)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런 쓰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결국 ‘통함(通)’에 이르는데 통함에 이르면 곧 도의 얻음(得), 즉 도통(道通)의 단계에 오른다. 그래서 장자는 얻음에 이르면 비로소 우리들이 도에 가까워진다고 말한다.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있는지의 이유에 대해선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가 없어서인 듯 싶은데 그래도 굳이 이유를 들면 ‘그러니까 그런 것(因是)’이다. 인시(因是)란 모든 것을 자연에 맡기고, 시비 판단을 가하지 않는 상태이다. 장자도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런 이치를 자연스럽게 터득했다고 보아진다. 그래서 언급할 필요를 특별히 느끼지 못했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특별한 이유를 언급하는 순간 이미 자신이 도와 멀어지는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 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
[원광지 2012년 05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