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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탁 칼럼 [玄, 장자와 소통] 천지도 하나의 손가락, 만물도 한 마리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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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 2,255회 작성일 2013-08-12 13:40본문
제목: 천지도 하나의 손가락, 만물도 한 마리의 말
천지도 하나의 손가락, 만물도 한 마리의 말
(원문)
以指喩指之非指,
不若以非指喩指之非指也.,
以馬喩馬之非馬,
不若以非馬喩馬之非馬也.
天地一指也, 萬物一馬也.
可乎可, 不可乎不可.
道行之而成, 物謂之而然.
惡乎然? 然於然.
惡乎不然? 不然於不然.
惡乎可? 可於可.
惡乎不可? 不可於不可.
物固有所然, 物固有所可.
無物不然, 無物不可.
내 손가락으로 상대방 손가락이 참
손가락이 아님을 설명하는 일은
손가락에 구애받지 않고 상대방
손가락이 참 손가락이 아님을 설명하는 일만 못하다.
내 말로써 상대방 말이 참 말이 아님을
설명하는 일은 말에 구애받지 않고
상대방 말이 참 말이 아님을 설명하는
일만 못하다.
천지도 하나의 손가락이고,
만물도 한 마리의 말이다.
그러니까 가하면 가한 것이고,
불가하면 불가한 것이다.
길이란 사람들이 다니다보니까
저절로 생겨난 것이고,
사물에 이름을 붙이다보니까 절로
이름이 된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그러하기에 그런 것이다.
어째서 그렇지 아니한가?
그렇지 않기에 그렇지 않은 것이다.
어째서 가한가? 가하기에 가한 것이다.
어째서 불가한가?
불가하기에 불가한 것이다.
사물은 본디부터 제각기 그런 바가 있고, 본디부터 제각기 가한 바도 있다.
그러니 세상만물은 본디부터
제각기 그렇지 않은 바가 없고,
본디부터 제각기 불가한 바도 없다.
‘내 손가락으로 상대방 손가락이 참 손가락이 아님을 설명
하는 일은 손가락에 구애받지 않고 상대방 손가락이 참 손가락이
아님을 설명하는 일만 못하다.’
몇 번을 읽어 보아도 무슨 소리인지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지시한다는 이야기는 중국 선종을 대표하는
텍스트 <육조단경>에서도 등장한다. 여기서는 ‘실제 달(記意)’과
‘달을 지시하는 손가락(記表)’ 관계로써 설명하는데 사람들은 실제
달을 보려 하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즉 언어와 문자에만
집착한다고 비판한다. 이런 식의 비판이 도(道)는 문자로선 전할
수 없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근거이다.
‘내 손가락으로 상대방 손가락이…못하다.’도 결국 불립문자의 내용과 연결된다. 그렇지만 표현 방법은 <육조단경>에서의 표현방식과는 다르다. <육조단경>에서는 ‘단박’이라는 돈오(頓悟)의 깨달음처럼 불립문자에 이르는 길에서 논리적 비약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반면 장자의 글에선 논리적 비약을 다소간 완화하기 위해 하나의
디딤돌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이고, 만물은 한 마리의 말이다
(天地一指 萬物一馬)’라는 명문이다.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 만물은 한 마리의 말 역시 무슨 의미일까? 먼저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부터 따져보자. 우리들이 하늘(天)을
표현할 때 언어를 통하지 않는다면 손가락으로 지시할 것이다. 땅(地)을 표현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경우 손가락 각도와 방향에 따라 하늘과 땅의 의미가 구분된다. 그렇다면 하늘과 땅은 손가락 각도와 방향의 차이일 뿐 모두 하나의 손가락으로 지시된다. 이래서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일 뿐이라는 주장이 성립된다.
‘만물은 한 마리의 말(馬)’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설명된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예로 들어보자. 우주에서의 만물이란 곧 수많은 별들을 의미한다. 그 중에는 금성, 화성, 명왕성, 북극성처럼 우리들이 이름을 붙인 별도
있지만 대부분의 별들은 그저 막연히 별이라고만 불린다. 크기에서, 밝기에서 차이가
날 텐데 이런 걸 고려하지 않고 똑같은 별이라 부르면 별들 입장에선 억울할 것이다. 그렇지만 제각각의 이름으로 구분하지 않고 총칭해서
별이라 불러도 우리들의 일상에선 큰 불편이
없다. 이것이 ‘우주의 만물은 하나의 별이다.’
라는 주장이 성립할 수 있는 근거이다. 따라서
‘지구에서의 만물도 한 마리의 말일 뿐이다.’
물론 장자의 이런 주장에 선뜻 동조하지 않을 사람도 있다.
금성, 화성, 명왕성 등으로 분명히 구분해야지, 이를 태양계 행성이라고 막연히 표현하면 의미 전달에 있어서 혼란이 생겨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시야를 태양계가 아니라 은하계로만 넓히더라도 금성과 화성은 우리들의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똑같은 별이다. 마치 지구에서 보는 하늘의 별들이 모두 똑같은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은하계에서의 입장이 바로 도(道)의 입장인 것이다. 장자는 우리들에게 이런 도의 입장에서 사물을 볼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내 말로써 상대방 말이 참 말이 아님을 설명하는 일은 말에 구애받지 않고 상대방 말이 참 말이 아님을 설명하는 일만
못하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있다. 이를 쉽게 풀이하면 이런 것이다. 상대방 말이 참 말이 아님을 증명하는데 말의 구체적 모습에 구애되지 않고 설명하는 게 내 말의 구체적 모습과 비교해서 설명하는 게 낫다는 이야기이다.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말의 모습을 비교하려 들면 세상에 같은 말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손가락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내 손가락과 어머니의 손가락을 비교하는 데 있어서 어머니 손가락이 내 손가락과 닮지 않았다고 하여 어머니 손가락을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장자의 이런 태도는 사물을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분석하는 일을 피하고자 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이면
되었지, 이 별이 은하계에 또는 오리온좌에 속한 별인지를 구분하는 일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서이다. 물론 이런 식의 구분이 과학에서는 필요하다. 과학은 매사를 객관화하고, 명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도학(道學)은 그 반대이다. 도학에선 사물의 의미를 구분함에 있어 소극적인데 그것은 의미를 가능한 많이 포함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이면 그만이지 서울과 지방을, 또 호남과
영남을 구분해서 사람의 의미를 구분하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의미를 구분하는 원초적 수단인 언어에 대해서도 자연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장자는 걸어다니는 ‘길’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통해
도(道)의 원리와 나아가 언어 성립의 배경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들이 걸어
다니는 길이란 ‘걸어다니다 보니까 생겨난 것(道行之而成)’이다. 산에 오르는 길을 연상하면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의 의미가 금방 다가온다. 이 길은 측량과 설계 등을 통해 만들어진 인위(人爲)의 길, 즉 반듯하게 뻗은 도로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이 길은 구불구불하지만 높은 산과 넓은 강이란 자연적 조건들을 무심(無心)으로 극복해서 만들어진 무위(無爲)의 길이다.
사물에 특정한 이름이 붙여지는 것도 길이 생겨난 원리와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이 ‘사물에 이름을 붙이다보니까 저절로 그런 이름을 갖게 된 것(物謂之而然)’이다. 우리가 실제 말에 대해 ‘말’이라고 부르니까 말을 지시하게 된 것이다. 만약 애초에 ‘소’라고 이름을 붙였더라면 사람들은 말을 소라고 불러왔을 것이다. 이처럼 언어가 표시하는 대상과 언어 사이의 관계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매우 자의적이고 임의적이다. 그래서 ‘가하면 가한 것(可乎可)’이다.
그런데 가하고 불가함을 정하는 데 어떤 기준이 있는 것일까? 기준이 없다고 장자는 분명히 말한다. 그래서 ‘어째서 그러한가?’라는 물음에 ‘그러하기에 그런 것이다.’는 식의 막연한 답변뿐이다. 또 ‘어째서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아가 ‘어째서 가한가?’에 대해서도 ‘가하기에 가한 것이다.’는 막연한 답변뿐이다. 또 ‘어째서 불가한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장자가 어째서 이런 식의 막연한 대답만을 했을까? 그것은 ‘만물은 본디부터 그런 바가 있고, 본디부터 가한 바도 있다(物固有所然 物固有所可).’와
‘만물은 그렇지 않은 바가 없고, 불가한 바도 없다(無物不然, 無物不可).’는
믿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것에는 고정된 의미란 없다.
선악(善惡), 미추(美醜), 심지어 유무(有無)조차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 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
[원광지 2012년 04월호]
천지도 하나의 손가락, 만물도 한 마리의 말
(원문)
以指喩指之非指,
不若以非指喩指之非指也.,
以馬喩馬之非馬,
不若以非馬喩馬之非馬也.
天地一指也, 萬物一馬也.
可乎可, 不可乎不可.
道行之而成, 物謂之而然.
惡乎然? 然於然.
惡乎不然? 不然於不然.
惡乎可? 可於可.
惡乎不可? 不可於不可.
物固有所然, 物固有所可.
無物不然, 無物不可.
내 손가락으로 상대방 손가락이 참
손가락이 아님을 설명하는 일은
손가락에 구애받지 않고 상대방
손가락이 참 손가락이 아님을 설명하는 일만 못하다.
내 말로써 상대방 말이 참 말이 아님을
설명하는 일은 말에 구애받지 않고
상대방 말이 참 말이 아님을 설명하는
일만 못하다.
천지도 하나의 손가락이고,
만물도 한 마리의 말이다.
그러니까 가하면 가한 것이고,
불가하면 불가한 것이다.
길이란 사람들이 다니다보니까
저절로 생겨난 것이고,
사물에 이름을 붙이다보니까 절로
이름이 된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그러하기에 그런 것이다.
어째서 그렇지 아니한가?
그렇지 않기에 그렇지 않은 것이다.
어째서 가한가? 가하기에 가한 것이다.
어째서 불가한가?
불가하기에 불가한 것이다.
사물은 본디부터 제각기 그런 바가 있고, 본디부터 제각기 가한 바도 있다.
그러니 세상만물은 본디부터
제각기 그렇지 않은 바가 없고,
본디부터 제각기 불가한 바도 없다.
‘내 손가락으로 상대방 손가락이 참 손가락이 아님을 설명
하는 일은 손가락에 구애받지 않고 상대방 손가락이 참 손가락이
아님을 설명하는 일만 못하다.’
몇 번을 읽어 보아도 무슨 소리인지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지시한다는 이야기는 중국 선종을 대표하는
텍스트 <육조단경>에서도 등장한다. 여기서는 ‘실제 달(記意)’과
‘달을 지시하는 손가락(記表)’ 관계로써 설명하는데 사람들은 실제
달을 보려 하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즉 언어와 문자에만
집착한다고 비판한다. 이런 식의 비판이 도(道)는 문자로선 전할
수 없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근거이다.
‘내 손가락으로 상대방 손가락이…못하다.’도 결국 불립문자의 내용과 연결된다. 그렇지만 표현 방법은 <육조단경>에서의 표현방식과는 다르다. <육조단경>에서는 ‘단박’이라는 돈오(頓悟)의 깨달음처럼 불립문자에 이르는 길에서 논리적 비약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반면 장자의 글에선 논리적 비약을 다소간 완화하기 위해 하나의
디딤돌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이고, 만물은 한 마리의 말이다
(天地一指 萬物一馬)’라는 명문이다.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 만물은 한 마리의 말 역시 무슨 의미일까? 먼저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부터 따져보자. 우리들이 하늘(天)을
표현할 때 언어를 통하지 않는다면 손가락으로 지시할 것이다. 땅(地)을 표현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경우 손가락 각도와 방향에 따라 하늘과 땅의 의미가 구분된다. 그렇다면 하늘과 땅은 손가락 각도와 방향의 차이일 뿐 모두 하나의 손가락으로 지시된다. 이래서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일 뿐이라는 주장이 성립된다.
‘만물은 한 마리의 말(馬)’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설명된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예로 들어보자. 우주에서의 만물이란 곧 수많은 별들을 의미한다. 그 중에는 금성, 화성, 명왕성, 북극성처럼 우리들이 이름을 붙인 별도
있지만 대부분의 별들은 그저 막연히 별이라고만 불린다. 크기에서, 밝기에서 차이가
날 텐데 이런 걸 고려하지 않고 똑같은 별이라 부르면 별들 입장에선 억울할 것이다. 그렇지만 제각각의 이름으로 구분하지 않고 총칭해서
별이라 불러도 우리들의 일상에선 큰 불편이
없다. 이것이 ‘우주의 만물은 하나의 별이다.’
라는 주장이 성립할 수 있는 근거이다. 따라서
‘지구에서의 만물도 한 마리의 말일 뿐이다.’
물론 장자의 이런 주장에 선뜻 동조하지 않을 사람도 있다.
금성, 화성, 명왕성 등으로 분명히 구분해야지, 이를 태양계 행성이라고 막연히 표현하면 의미 전달에 있어서 혼란이 생겨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시야를 태양계가 아니라 은하계로만 넓히더라도 금성과 화성은 우리들의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똑같은 별이다. 마치 지구에서 보는 하늘의 별들이 모두 똑같은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은하계에서의 입장이 바로 도(道)의 입장인 것이다. 장자는 우리들에게 이런 도의 입장에서 사물을 볼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내 말로써 상대방 말이 참 말이 아님을 설명하는 일은 말에 구애받지 않고 상대방 말이 참 말이 아님을 설명하는 일만
못하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있다. 이를 쉽게 풀이하면 이런 것이다. 상대방 말이 참 말이 아님을 증명하는데 말의 구체적 모습에 구애되지 않고 설명하는 게 내 말의 구체적 모습과 비교해서 설명하는 게 낫다는 이야기이다.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말의 모습을 비교하려 들면 세상에 같은 말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손가락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내 손가락과 어머니의 손가락을 비교하는 데 있어서 어머니 손가락이 내 손가락과 닮지 않았다고 하여 어머니 손가락을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장자의 이런 태도는 사물을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분석하는 일을 피하고자 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이면
되었지, 이 별이 은하계에 또는 오리온좌에 속한 별인지를 구분하는 일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서이다. 물론 이런 식의 구분이 과학에서는 필요하다. 과학은 매사를 객관화하고, 명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도학(道學)은 그 반대이다. 도학에선 사물의 의미를 구분함에 있어 소극적인데 그것은 의미를 가능한 많이 포함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이면 그만이지 서울과 지방을, 또 호남과
영남을 구분해서 사람의 의미를 구분하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의미를 구분하는 원초적 수단인 언어에 대해서도 자연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장자는 걸어다니는 ‘길’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통해
도(道)의 원리와 나아가 언어 성립의 배경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들이 걸어
다니는 길이란 ‘걸어다니다 보니까 생겨난 것(道行之而成)’이다. 산에 오르는 길을 연상하면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의 의미가 금방 다가온다. 이 길은 측량과 설계 등을 통해 만들어진 인위(人爲)의 길, 즉 반듯하게 뻗은 도로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이 길은 구불구불하지만 높은 산과 넓은 강이란 자연적 조건들을 무심(無心)으로 극복해서 만들어진 무위(無爲)의 길이다.
사물에 특정한 이름이 붙여지는 것도 길이 생겨난 원리와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이 ‘사물에 이름을 붙이다보니까 저절로 그런 이름을 갖게 된 것(物謂之而然)’이다. 우리가 실제 말에 대해 ‘말’이라고 부르니까 말을 지시하게 된 것이다. 만약 애초에 ‘소’라고 이름을 붙였더라면 사람들은 말을 소라고 불러왔을 것이다. 이처럼 언어가 표시하는 대상과 언어 사이의 관계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매우 자의적이고 임의적이다. 그래서 ‘가하면 가한 것(可乎可)’이다.
그런데 가하고 불가함을 정하는 데 어떤 기준이 있는 것일까? 기준이 없다고 장자는 분명히 말한다. 그래서 ‘어째서 그러한가?’라는 물음에 ‘그러하기에 그런 것이다.’는 식의 막연한 답변뿐이다. 또 ‘어째서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아가 ‘어째서 가한가?’에 대해서도 ‘가하기에 가한 것이다.’는 막연한 답변뿐이다. 또 ‘어째서 불가한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장자가 어째서 이런 식의 막연한 대답만을 했을까? 그것은 ‘만물은 본디부터 그런 바가 있고, 본디부터 가한 바도 있다(物固有所然 物固有所可).’와
‘만물은 그렇지 않은 바가 없고, 불가한 바도 없다(無物不然, 無物不可).’는
믿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것에는 고정된 의미란 없다.
선악(善惡), 미추(美醜), 심지어 유무(有無)조차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 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
[원광지 2012년 04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