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불교 원남교당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
   
홈 회원가입 로그인
원불교동영상
금주의설법동영상
강연동영상
감상담동영상
금주의법문
금주의열린마당
원남회보
검색
관련사이트
 
Home > 법회/법문 > 금주의설법동영상

                     ::: 로그인후 글쓰기 버튼이 나타납니다. 이용에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작성일 : 2016-07-18 10:40
달마의 영상을 걸릴 수 있겠는가. 원기101년 7월 17일 전산 박덕희 교무 설교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742  
*녹음 마이크 배터리 방전으로 영상녹음이 되지 않아 설교안을 올리오니 양해 바랍니다.

달마의 영상을 걸릴 수 있겠는가

                                                                                                        101.7.17. 법의문답 설교

반갑습니다. 오늘 설교시간엔 법의문답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접수된 질문이 2개입니다. 6단에서 “개(犬)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질문해 주셨고, 10단에서는 대종경 성리품 14장에 대해 질문해 주셨습니다. 성리품 14장은 지난 달 의두연마 제목이었죠. 사정상 설교를 못했는데 법의문답으로 제출해 주셨네요. 비중으로 볼 때 성리품 14장을 먼저 하고, 이어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공부하겠습니다.

먼저 『대종경』 성리품 14장입니다. 원불교 초입자를 위해 법문의 배경을 잠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봉래정사’는 전북 부안 변산에 있는 초당입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 원기 4년부터 원기 9년까지 심신수양과 교법초안을 하기 위해 머무셨던 장소였죠.

문정규 선진은 1863년 생으로 호는 동산(冬山)이시고, 소태산 대종사께서 봉래정사에 계실 때 전문 시봉인 이었습니다. 총부 대각전에서 대종사께서 법설할 때면 박사시화ㆍ김남천 선진과 더불어 백발을 휘날리며 춤을 추어 법흥을 돋구었던 어른이었습니다. 문정규 선진은 소태산 대종사님보다 약 30세 위 연상이십니다. 이런 분이 30세의 젊은 대종사님을 시봉하였다는 사실이 참으로 경이로운 일입니다.

자, 다음은 달마 대사 인데요. 달마 대사를 모르는 분은 없겠죠. 달마 대사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선승으로 석가모니불로부터 28대 조사이며,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가 되죠. 양무제와의 ‘소무공덕’의 일화는 다 아실테고, 달마도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라는 말이 꽤 유명합니다.

성리품 14장에 대한 해답의 열쇠는 마지막 문장에 있습니다.
“동천에서 오는 기러기 남천으로 갑니다.”

동천이란 동쪽 하늘이고, 남천은 남쪽 하늘이죠.
기러기는 한 곳에 머무는 새가 아니라 이동하는 철새입니다. 많이 보셨겠지만 이동할 때 경험이 많은 기러기를 선두로 하여 V자 모양으로 높이 날아갑니다.

방위상으로 동쪽이냐, 남쪽이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고요. 오고 가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핵심이냐?
동쪽 하늘에 있던 기러기나 남쪽 하늘에 있던 기러기가 같다는 것입니다. 이해되시나요? 제가 어제는 익산에 있다 오늘 서울에 왔습니다. 익산에 있었던 박덕희와 서울에 있는 박덕희가 같은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입니까? 똑 같은 사람이죠.

“동천에서 오는 기러기 남천으로 갑니다.” 범부 중생은 동쪽이다 남쪽이다에 현혹되고 헷갈립니다. 오고 가는 것에 집착하고 끌려 다닙니다. 동쪽에서나 남쪽에서나 한결 같은 모습, 오고 가는데 걸림없는 한결 같은 모습. 그 모습이 있죠. 그것이 나의 참 모습, 참 주인공입니다. 

자, 달마대사와 정규가 다르다는 것입니까, 같다는 것입니까? 정규의 답은 달마와 정규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그래서 정규가 걷는 것이 달마의 영상을 걸린 것이 되는 겁니다.

현실세계에 있어서는 분명히 다르죠. 달마는 달마이고, 정규는 정규입니다. 달마는 1500년 전 사람이고, 정규는 1920년대 사람입니다. 달마대사의 생김새와 정규의 생김새도 다릅니다. 달마는 법 높은 스님이고, 정규는 나이는 있으나 입문한지 얼마 안 되는 초보 공부인 입니다. 혹 닮은 부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같은 사람은 아니란 얘기입니다.

자, 이렇게 다른데 달마와 정규가 어떻게 같은가? 세 가지 관점에서 왜 같은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깨달음의 관점입니다.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원기 16년(1932) 가을에 불국사와 석굴암을 탐방하기 위해 경주에 가십니다. 경주에 가셨을 때, 동학을 창도하신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묘를 찾게 됩니다. 한참 묵념을 하던 소태산 대종사께서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자기 묘 앞에 자기가 절을 하는 것을 보았나?”

이렇게 보면 대종사님께서 수운 선생의 환생이 아닌가? 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윤회적 관점에서 보면 정규가 달마 대사의 환생으로 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윤회 환생적 관점을 넘어 깨달음의 관점에서 보면 수운 대신사와 소태산 대종사가 둘이 아닌 하나라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당처, 제불제성의 심인 자리는 하나입니다.

둘째, 성리적 관점입니다.
본성, 불성 자리에선 달마와 정규가 하나입니다.
“일원은 일체중생의 본성”이라고 했습니다. 달마건, 정규건, 소태산 대종사님이건, 덕희이건 본원, 본성 자리에서는 모두가 하나입니다.

불성의 측면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평등한 존재입니다. 현실의 세계엔 이름도 다르고, 모습도 다르고,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에서 각자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진리의 본원 자리에서 보면 같다는 것입니다.

셋째, 수행적 관점입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제자가 이어받아 실천하면 스승과 제자는 하나가 되죠. 천지의 도를 인간이 체 받아 실천하면 하늘과 인간은 하나가 됩니다. 천인합일이 됩니다. 깨달음이 일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뜻을 이어 받으면 한 마음, 한 뜻이 됩니다.
 
성리품 14장에서 우리는 활불, 살아있는 부처를 만나게 됩니다.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정규에서 “벽에 걸린 저 달마의 영상을 걸려보라.”고 하십니다.
벽에 걸린 달마의 그림과 몸소 걷는 정규의 발걸음. 어떤 것이 활불의 모습일까요?
그림으로 그려진 영상이 등상불이라면, 정규가 걷는 모습은 활불의 모습입니다.

아까 대종사님께서 원기16년에 경주에 가셨다고 했는데요. 석굴암 탐방을 마치고 내려오자 그곳을 지키는 사람이 탐방기념 글을 청합니다. 대종사님을 수행했던 조송광 선진은 이렇게 씁니다. ‘土含山石窟庵 無語佛度衆生 “토함산 석굴암의 말없는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한다.” 맞는 말이죠. 아직까지도 말없는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하고 있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님께서는 거기에 어떻게 쓰셨냐. 궁금하죠? 국한문 혼용으로 이렇게 쓰십니다. “無情한 石窟庵도 모든 사람의 讚議를 받거든 況 구별력 있는 사람이 어찌 그저 있으랴 - 不侶居士” 

이게 무슨 뜻입니까? 무정한 석굴암도 모든 사람의 찬탄을 받습니다. 하물며 “구별력 있는 사람이 어찌 그저 있으랴” 살아있는 부처를 말씀하시죠. 우리 모두가 활불이 되어야 하고, 활불이 찬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십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달마의 영상을 왜 걸리라 했을까요? 화석화된 부처가 아니라 활동하는 부처님, 살아 움직이는 부처님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성리품 14장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제가 기도를 하면서 대종사님의 사진을 바라봤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대종사님의 영상을 능히 걸릴 수 있겠는가’ 저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교도님들은 어떠십니까? ‘대종사님의 영상을 능히 걸릴 수 있겠습니까!’
대종사님께서 저 사진속에서 걸어 나오셔야 합니다. 바쁘시면 뛰쳐나오셔야 합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내가, 우리가 대종사님이 되어 걸어야 합니다. 수천 수만의 대종사님이 걸어 나올 때 우리 회상은 천여래 만보살 회상이 될 수 있고, 활불의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대종사님을 걷게 하는 방법을 다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교도님들! 그림으로 그려진 달마대사가 부처입니까, 걷고 있는 정규가 부처입니까? 절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님이 중요합니까. 집에 있는 며느리 부처님이 더 중요합니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이제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참 재미있는 질문이죠? 개한테 물어보긴 좀 그래요. “너, 불성이 있냐, 없냐?” 어떻게 대답할까요? 개는 그냥 “멍, 멍” 짖습니다.
불교 선종의 대표적인 화두중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이란 화두가 있습니다.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화두는 조주어록에 나오는데요. 불교의 1,600가지 화두 중 이 화두를 깨쳐서 견성한 사람이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내용을 대화식으로 엮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 학승이 묻습니다.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 선사가 대답합니다. 
“없다!”
학승이 묻습니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는데, 왜 저 개만 없는 것입니까?”
조주선사가 대답합니다.
“개에게 분별의 업식(業識)이 있기 때문이다.”

학승은 왜 개에게 불성이 있는지, 없는지 질문했을까요?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불성은 주로 인간에게 해당하는데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는 강한 물음입니다.
「열반경」에서는 “일체중생 실유불성”을 말합니다. 일체 중생 모두에게 불성이 있다는 뜻이죠. 일체중생의 범주에는 개뿐만 아니라 꿈적거리는 미물 전체가 해당하죠. 이렇게 미물도 불성이 있다고 하는데 당연히 개에게도 불성이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입니다. 불성 소유의 범주를 인간을 넘어서 일체생령으로 확대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원불교에서는 불성의 소유를 어느 정도까지 봤을까요?
“일원은 일체중생의 본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당연히 일체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되죠. 소태산 대종사님은 불성이 있다는 정도를 넘어 처처불상을 말씀하십니다. 천지만물 허공법계가 다 부처라는 것입니다. 부처로 봐야 한다가 아니라 부처이니 부처님으로 모시고 불공하라고 하십니다. 

자,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와서,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정답은 있다고 해도 틀리고 없다고 해도 틀립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이것이 이 화두의 함정입니다. 이 정도 말씀드렸으면 눈치를 채셔야 하는데.... 지금 웃으시는 분들은 눈치를 채신 것 같기도 하고요.

어느 날 다른 학승이 와서 똑 같은 질문을 합니다.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때 조주 스님은 “있다(有)”라고 대답합니다.
왜 조주 선사는 같은 질문에 어느 때는 있다고 하고, 어느 때는 없다고 한 것일까요?

이 화두가 가르치는 것은 있다, 없다는 생각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있다, 없다 사량 분별을 떠난 자리에서 봐야 일체중생, 일체만물이 다 부처로 보이고 부처로 드러납니다. 분별의 업식으로는 절대 부처를 볼 수 없습니다.

또 개에게 불성이 있다, 없다는 것은 개와 인간을 차별하는 차별심을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령한 인간에게는 불성이 있고, 미천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사상중 인상에 해당하죠. 금강경에서는 이 사상에 사로잡혀 있으면 참다운 부처, 여래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앞에 공부한 성리품 14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정규가 걷습니다. 정규 입장에서 달마와 정규를 나누고 부처와 중생을 나누려는 생각, 이런 분별심과 차별심을 가지고 걸었다면 정규는 결코 달마가 될 수 없죠. 정규다 달마다, 중생이다 부처다 라는 분별과 차별을 놓고 텅 빈 진공의 마음으로 걸었다면 정규가 걷는 것이 바로 달마가 걷는 것이 됩니다.

설교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영화 ‘곡성’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가 있죠. “뭣이 중헌디, 뭣이 중하냐고!!
개에게 불성이 있다, 없다. 사실 이 문제 보다 더 중한 것이 있습니다. 인간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다고 볼 때, 불성을 회복하는 것, 부처가 되는 일, 부처로 살아가는 것,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부처를 확인하는 일, 부처가 되는 일에 게을리 해서는 절대 안 되겠습니다.

요즘 집에서 애완견을 많이 키우시죠. 고양이도 그렇고요.
강아지를 보면서, 고양이를 보면서 예쁘다, 예쁘다만 하지 마시고요. “구자무불성”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 “구자유불성” 개에게 불성이 있다.

이 화두를 연마하셔서 한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이 살아있는 부처, 활불로 진급하시기 바라면서 저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Total 286
번호 제   목 글쓴이 날짜 조회
206 원기101년 12월 15일. 결산법회 솔타원 황덕규 교감 … 관리자 2016-12-31 306
205 원기101년 11월 20일 전산 박덕희 교무 - 법의문답 관리자 2016-11-20 286
204 원기101년 11월 6일. 전산 박덕희 교무 설교 - 육안과… 관리자 2016-11-06 288
203 원기101년 10월 16일. 솔타원 황덕규 교감 설법 - 공… 관리자 2016-10-17 269
202 원기101년 9월 25일. 전산 박덕희 교무 설교 - 고로석… 관리자 2016-09-25 316
201 원기101년 9월 11일. 솔타원 황덕규 교감 설법 - 잘 … 관리자 2016-09-12 318
200 원기101년 8월 28일. 전산 박덕희 교무 설교 - 견성의… 관리자 2016-08-28 382
199 원기101년 8월 21일. 법인절 솔타원 황덕규 교감 설법… 관리자 2016-08-22 352
198 원기101년 8월 14일. 솔타원 황덕규 교감 설교 - 일상… 관리자 2016-08-18 302
197 원불교 좌선법 - 훈산 길도훈 교무 관리자 2016-07-24 550
 
 
 1  2  3  4  5  6  7  8  9  10    
and or
회원가입약관개인정보취급방침오시는길
서울시 종로구 원남동22-1 원불교 원남교당 (우)110-450 TEL: 02-762-9100, 02-762-9133
이메일: wwonnam@hanmail.net, FAX: 02-745-5987, Copyright (C) 2014 원남교당 All rights reserved.